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나라의 일본원정 (문단 편집) === 또다시 신의 바람이 불다 === || [[파일:segunda-batalla-de-hakata-1281-barcos-japoneses-atacando.png|width=350]] || 그러나 음력 7월 30일, 다카시마 근해에 강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했고[* 사실 이번 2차 원정 시기는 [[동아시아]]에서 [[태풍]]이 많이 활동하는 6월 - 8월(양력)이다, 즉 앞의 1차 원정과 달리 '''2달 동안 강풍을 안 만난 게 기적이었던 것이다'''.], 적어도 3500여 척의 배들이 서로 충돌하거나 바위에 부딪혀 대부분 침몰하거나 떠내려 가 버렸다. 이에 훈둔, 범문호 등 지휘관들은 그 즉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기들끼리 멀쩡한 배를 골라 타고는 '''병사들을 몽땅 내버린 채''' 일본에서 달아난다. 그 외 2만 명 가까운 고려군이 배를 타고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일단 공식적인 생존자는 이들밖에 없다. 일본에 남겨진 나머지 군사들은 전부 포로가 되거나 몰살당했다. 이미 육지에 있었거나 박살난 배에서 탈출해 살아남은 인원은 약 10만에 달했는데, 이들은 장백호라는 인물을 장총관이라 부르며 우두머리로 삼은 후, 산 속으로 들어가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어 돌아오려 했으나, 소형 선박만으로 게릴라전만 하던 막부군이 본함대를 동원하여 대규모 공격을 가해 오자 굶주림에 오래 버티지 못해 대부분이 패사했으며 남은 생존자들도 모두 항복하였다. 고려사와 원사에 따르면 막부군은 포로들 중에서 우선 고려인, 몽골인, 한인(북중국인)을 선별해내 이들부터 모조리 참수했고, 신부군(남송인)만이 살아남았다. 고려사에 의하면 그 뒤 8월 7일에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자, 기술자 등 2~3만 명만 살려주고 나머지 남송인을 모두 참수. 9일에도 추가로 다수가 참수되었고, 나머지는 당인([[당나라]] 사람)이라 하여 노예로 삼아 본토로 끌고 간다.[* 당시 일본은 [[중국 대륙]]의 왕조나 문화권을 그 시점에서의 정식 국호로 호칭하지 않고 일본과 제일 밀접한 관계였을 시절의 국호인 당(唐, 일본어로는 카라 또는 도우라 읽는다.)으로 퉁쳐 불렀다. [[명나라]]로 쳐들어가려던 [[임진왜란]] 역시 카라이리(唐入り)라 불렀다. 심지어 조선인을 비롯한 외국인도 당인(唐人, 도진)이라 불러서 [[조선 통신사]]가 항의하는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했으며([[아메노모리 호슈]] 문서로.), 통신사의 수행원이었던 조선인 최천종이 일본 측 역관에게 살해당하는 사건 역시 당나라 사람 살인사건(唐人殺し)라 불렀다. 사실 [[무로마치 막부]]부터 당시 일본 사상가들의 세계관은 전통적인 일본(本朝), 중국(唐土), 인도(天竺)의 삼국관에서 무로마치 말기 이후 인도가 탈락하고 유럽(南蛮)이 추가되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를 근세적 삼국관이라하며 이들의 세계관에서 조선, 류큐, 에조 등은 중국이나 일본에 종속된 존재로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 기록들을 참고하자면 막부는 포로가 도망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선박을 왕래하며 감시하도록 고케닌(御家人)에게 명하였다. 또한, 근래에, 오사카부(大阪府) 이즈미시(和泉市)내의 한 절이 소장하고 있는 『대반약파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経)』 경전의 수정(修正)에, '코안의 역(弘安の役)' 때 투항했던 포로가 코안 9년 (1286년) 4월 초순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본 서적에는「대당국강서로서주군인하삼어(大唐国江西路瑞州軍人何三於)」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경전의) 수정(修正)에 종사하고 있었던 사람은 강남군(江南軍)에 소속되어 있던 군인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남송인 포로들의 처분은 각기 따로 맡겨진 곳에서 자율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알려졌다. 제 2차 원정에 참여한 고려군 26,989명 중 7500여명이 죽고 19,397명이 생환했다. 남송에서 참전한 지휘관급을 제외한 병사는 공식적으로 우창, 막청, 오만오 '''단 3명'''만 귀환하는 데 성공했으며,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jo.k_0023_0208_0010_0190|그나마도 당장 귀환한 자는 없고 나중에 도망쳐온 자들만 있었다.]] 물론 지휘관급이 아닌 몽골인 중에는 단 한 명도 생존자가 없었다.[* 우창은 포로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탈출하였으나 막청과 오만오가 일본에서 탈출해 고려에 귀부한 해는 [[충렬왕]] 8년인 1302년이었다. 여몽연합군이 합포를 떠난 해가 1281년이었으니 장장 20년 이상을 노예로 혹사당한 것이다. 나머지 포로들은 노예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군의 생환자가 원나라군보다 많았던 데는 전투에 소극적인 점도 한몫했다. 김방경의 태도와 별개로 고려군 자체는 전의가 원나라군보다도 떨어져 있었으며[* 특히 강제로 동원되었고 원나라에 대한 악감정이 많았다.], 방어할 때는 잘 싸웠으나 공세에는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이 견해는 원사(원나라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추측하는 것이고, 실제 전투 주력군은 고려군이었으며 이 증명은 당시 일본군 지휘관이던 가마쿠라 막부의 타케자키 스에나가 장군이 제작한 몽고습래회사라는 그림의 분석을 토대로 고려군이 원나라군에 비해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했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KBS 역사스페셜 145회에 방영되었다.] 물론 그 이유는 몽골이 자신들이 정복한 지역의 군대를 화살받이 선봉대로 내세우는 전술을 사용해왔기 때문이고, 여기선 정복당한 고려국의 군대가 선봉대로 차출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고려인 생존자가 월등히 많이 생환하자 이로 인해 원에서는 고려군이 일부러 원나라군을 몰살시키기 위해 [[사보타주]]를 한 것으로 의심하기까지 했다.[* 1차와 2차 원정 모두 귀환병의 절대다수는 고려인이었고, 고려군 병력들만이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제대로 된 함선에 타고 있었기에 의심할 만한 상황이기도 했다. 하지만 고려군의 조선술과 고려 지휘관인 김방경의 판단력이 원나라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기 때문에 귀환 비율이 높았다는 역사학자들의 의견도 다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